이 글은 「해담솔 특별호」 (2024. 02.) 11~18P의 내용을 전재한 것입니다. |
목차 - 서문 - 가포고 개교 이전 (1968~1985) - 마산가포고의 시작 (1996~2003) - 내적 리모델링, 가포고의 변신기 (2003~2009) - 새로운 본관 시대, 운영 안정기 (2010~2016) - 여전한 정치적 약자, 학습환경 보호 및 이전 반대 투쟁기 (2016~2019) - 새로운 도약, 가포고의 지금 (2020~) |
글/ 김경훈
짧게만 느껴졌던 3년간 학교를 다니며 늘상 궁금하고 아쉬웠던 것이 우리 학교의 역사를 체계적이고 다각적으로 정리한 자료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곳의 역사를 글로 정리하여 모두와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늘 있었으나 항상 현실의 과제가 앞서 졸업이 코앞까지 오도록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 교지 「해담솔」 발간이 결정되고 지면의 여유가 나게 되어 여태 나의 숙원이었던 그것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급적 가장 정제되고 유려한 문체, 그리고 여러 자료들을 쓰며 정사서에 필적하는 것을 만들고 싶었으나 나의 필력과 사료, 시간의 한계로 그러지 못한 채 아쉬운대로 약사略史를 씀에 그치게 되었다. 향후 정사가 편찬된다면 꼭 함께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서설은 접고 이만 이곳의 흔적을 돌아보는 여정을 시작해보려 한다.
가포고 개교 이전 (1968~1995)
이곳에 가포고가 생기기 이전 다른 학교들이 있었단 것은 가포고생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법한 얘기다. 그렇다. 이곳의 너른 부지는 본래 고등학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더 앞으로 돌아가선 원래 학교도 아니었다. 가포동은 예로부터 바다를 끼고 있는 한산한 어촌과 산촌이었고, 근대까지 밤나무가 많아 고려 말~조선 초 대부터 율구미栗仇美, 즉 ‘밤나무촌’으로 불렸다. 가포고 부지 역시 합포의 작은 마을에 딸린 밤밭으로 오랜 시간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 교원양성체계 내실화의 일환으로 초등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이 계획된 마산교육대학의 부지로 낙점되어 개발이 시작되었고, 교육지로서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1969년 개교한 마산교대는 250명의 입학생을 시작으로 8회에 걸쳐 1,700명의 본과 정교사 졸업생과 1970년에 설치된 초등교원연수원에서 1,764명의 교감·정교사 수료생, 기타 주부시민대학 등에서의 여러 지역민 평생교육생을 배출했다. 학교 신축 과정에서 교비를 횡령한 학장(종합대학의 총장과 같음)이 전국에 수배되거나 예비고사 도입 이후 전국 커트라인이 과도하게 높게 설정되어 합격생이 정원에 미달하는 등 안타까운 역사도 있었으나 지역의 건실한 국립대학으로 자리하던 마산교대는, 이후 1978년 2월 정부의 초등교원 수급 조정에 따른 ‘1도 1교육대학제’에 따라 경상남도에 진주교육대학교만 남게 되는 것으로 결정되며 마산초급대학으로, 일 년 후 마산대학(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름)으로 그 이름과 기능이 변경되었다. 당시 마산교대의 교지로 「마산교육대학보」와 「갈마」가 전해지며, 축제로는 ‘갈마음악회’ 등이 있었다.
이후 마산대학은 1979년 첫 입시에서 당시 국립대 중 최고 수준인 17.4:1의 경쟁률을 기록하였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로 경영학과·무역학과·회계학과·행정학과·미술학과·음악과의 6개 학과를 거느린 지역의 종합대학이 되었다. 이후 많은 발전과 확장을 거듭하며 캠퍼스 협소 문제, 특히 도서관 건물의 부재와 박물관 유물 소장 공간 부족이 제기될 때 정부의 창원 지역 육성 정책이 펼쳐짐에 따라 1981년 사림동으로 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3년 1월 30일 마산대학은 현재의 창원대학교 위치로 이전, 지금의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마산대학이 빠져나간 후 이곳의 부지와 시설은 대부분 사용되지 않았으나, 체육관의 경우 1982년 제63회 전국체전 경기장으로 활용되는 등 지역의 공공 체육시설로 애용받았다. 그래서일까, 이후 고교특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경남체육고등학교의 부지로 선정되어 체고가 설립, 운영되었다. 1984년 인가, 다음해 문을 연 경남체고는 개교 직후부터 수영·복싱 등 여러 종목에서 두각을 보이며 선전했고, 1994년 진주 진성으로 이전할 때까지 총 87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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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육대학의 모습. | 경남체고 개교 및 입학식 (1985. 3. 20.). 체육관 건물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마산가포고의 시작 (1996~2003)
한편 마산 지역의 고등학교 입시는 치열하다못해 불타오르는 상황이었다. 각자 시험을 치거나 중학교 내신 성적 등으로 입학생을 결정하던 기존의 ‘마산연합’ 계 고등학교에도 1979년부로 평준화 조치가 적용되었고, 교육과정평가원에서 진행하는 고입선발고사(일명 ‘연합고사’)를 치뤄 커트라인 내에서 무작위로 연합 내 고등학교에 배정되게 되었다. 그러나 급격하게 성장하며 거의 정점에 다다른 마산의 도시 규모를 기존의 연합 내 고등학교 정원이 뒷받침하지 못했고, 이는 고입 합격선의 과도한 상향을 낳았다. 당시 마산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 연합고사 합격선이 200점 만점에 170점대 중후반이었는데, 이는 동시기 서울 인문계 고등학교 합격선이 140점대, 전국 최상위 특목고 합격선이 180점대 초중반이었음을 고려하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고등학교 미진학자 및 함안 등 타지로 가는 유학생의 폭발적인 증가가 지역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자 교육계 등지에서 지역 내 새로운 고등학교 설립을 추진하였고, 그 노력으로 마침 비어있던 이곳 부지에 1995년 10월 2일 10학급 소규모의 남녀공학 고등학교 설립이 가인가되었다. 즉 당시 가포고는 일종의 ‘커트라인 확장’ 차원에서 개교한 것이었고, 실제로 평준화 대상이 아니어서 주로 마산연합 내 고등학교 입시에 탈락한 학생들이 청강고등학교(현 마산제일고) 등과 함께 입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1996년 3월 5일 남학생 261명, 여학생 260명으로 계 521명의 입학생이 이곳 가포고의 역사적인 첫문을 열었다. 아직 교사가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전신인 마산교대와 경남체고에서 사용하던 기존의 교실과 별관을 개조한 임시 교실을 이용하면서 개교했으나, 그해 24학급 증설 및 신관 준공으로 수용력을 대폭 늘렸다. 또 급식학교로 지정되어 ‘도시락 문화’를 끝낸 선구적인 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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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월 개교 당시의 가포고 교문. | 가포고 제1회 입학식. |
다음 해인 1997년부터는 창원 문성고·경일고 등과 함께 연합고사 성적 반영 대상 학교로 선정, 마산연합에 편입되었고 742명의 입학생이 들어와 학교 규모가 대폭 늘어났다. (이후 몇 년간 41학급까지 점차 확장되며 중-대규모 학교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개교 직후 인지도나 정치적인 권력 등에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가포고는 개교 직후부터 몇 가지 사건에 놓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997년 있었던 학교 뒤 야산에의 기습적인 소각장 설치 계획과 이에 따른 학생들의 반발 서명전이 있다.
당시 마산시는 가포고를 감싸고 있는 갈마산 구릉지에 소각장을 설치할 계획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본격적인 공사 이전 밤밭고개에서 가포 방향으로 쓰레기차가 소각장으로 가기 위한 도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현재는 산책로로 쓰임).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가포인들이 가포만을 비롯한 학교 근처의 환경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을 우려, 자체적인 대책 마련 조직을 꾸리고 환경운동연합과 연대하는 등 즉각 대응에 나섰다. 가포인들은 갈마산 기슭의 마산기상대(현 창원기상대)를 찾아 풍향 등의 데이터를 조사·분석, 소각장이 학교 교육과 지역의 거주환경에 미치는 직접적인 악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마산 일대의 주택가에 게시하고 유치 반대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반 년 가량이 지나 시에서 유치 철회를 선언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사건은 학생들이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거대 행정에 성공적으로 맞서 이겼다는 점에서 지금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여하튼 이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신설 공립학교라는 점이 학교의 문화를 만드는 과정이나 시설의 질 등에서 매우 큰 장점이 되어 행정의 전폭적 지원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진학, 문화예술, 체육 등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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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체육대회. | 첫 학예제 (갈마제). |
일례로 진학 면에서는 2000학년도부터 4년간 서울대학교 30명 진학과 수능 만점자 배출(2001, 김준연 선배) 등 지역 내 다른 고등학교들에 꿇리지 않는 결과를 만들었다. 비단 대학입시 실적뿐만 아니라 1998년 외국어학력경시대회 금상과 은상(각 문정윤·강동만 선배), 2001년 고교생영어말하기대회 금상(김유진 선배)과 한국외대 외국어경시대회 금상(공강아 선배, 블룸버그통신 기자), 같은해 서울대 언어경시대회 금상(이창규 선배), 2003년 중고등학생 외국어학력경시대회 스페인어·일본어 부문 금상(각 손유향·강현석 선배) 등 외국어 영역에서도 기록을 남겼다.
문화예술 면에서는 특히 2000년에 제38회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피아노·작곡 부문 각각 최우수(각 남성은·허경진 선배), 전국학생국악경연대회 1등 수상자(변정섭 선배, 현 국립남도국악원 단원) 등을 배출하는 등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개교 초기 동아리에의 적극적인 투자는 제7회 청소년댄싱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2002, 섀도우), 제6회 추계 중고생 뮤지컬댄스경연대회에서 특상(2002, 박찬민·심현준·이송대 선배, 현 뮤지컬 작가), 청소년문화페스티벌 밴드 부문 금상(2004, 아이러니), 추계청소년문학상 최우수 (2005, 권보배 선배), 청소년문화예술제 금상(2005, 최창규·주석훈 선배) 등 수많은 유산을 남겼다.
체육 면에서도 개교 직후부터 가포고 부지를 물려준 경남체고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전국체전 입상을 거듭하더니 개교 2년차인 1998년 레슬링 대통령기 1위와 3위에서 각 2명(이민욱·신동현 선배), 5명이 수상하는 등 걸출한 기록을 남겼다. 이외에도 KBS배 1위를 거의 모든 체급에서 석권하고 (1999, 김병국 선배 등 6인) 전국체전, 대통령기, 협회장기 등 주요 대회에서 고성적을 거두는 등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2000년에는 회장기 전국레슬링대회와 춘계전국검도대회에서 종합·단체 우승하며 양 종목에서 전국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1년 주니어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김지웅 선배, 이후 국제대학오픈선수권 챔피언), 같은 해 아시아레슬링선수권 우승과 4강 진출(각 박진성·김병국 선배), 2003년 세계주니어선수권 금메달(박진성 선배, 국가대표를 거쳐 현 경남대 레슬링부 코치) 등 메이저 국제대회 수상으로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물론 지금 들어 입시나 수상 실적을 잘 만드는 학교가 ‘좋은 학교’가 아님은 교육적으로 자명해졌으나, 이러한 기록을 통해 당시 생존을 위해 인지도를 높이는 치열한 투쟁을 이어갔던 가포고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한편 교지 「해담솔」은 1999년 2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매년 발간되었다. 교지 원본은 역사관 등에도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 구할 수 없었으나, 「가포10년사」에 창간 축시가 실려있어 일부를 가져와본다. “··· 동방에 솟는 해가 해담솔 비쳐주니 / 천지의 밝은 기운 솔향기로 녹아든다 / 비우고 또 채울수록 온고지신 새로워 ···” 이외에도 2001년 발간되어 분기별로 발행된 학교신문 「갈마문화」(14호 이후 웹진으로 발간, 정확한 폐간 시점은 알 수 없음) 와 동아리지 「가포 동아리」, 5집까지 발간된 「큰들」, 2000년대 중반 만들어진 만화동아리지 「M.I.」 등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융성했던 가포고 개교 초기의 학생 문화를 알 수 있다. 초창기 학생 동아리는 53개, 동아리실은 22실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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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해담솔」. | 학교신문 「갈마문화」. |
내적 리모델링, 가포고의 변신기 (2003~2009)
가포고의 입지가 높아지던 2003년 재난이 찾아왔다. 전국, 특히 마산을 강타한 태풍 ‘매미’로 인해 이곳도 별관(현 종합관)지붕과 옹벽이 붕괴되고 건물 주요부가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고 교육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러나 가포인들을 비롯한 지역 교육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태풍 발발 6일만에 윤덕홍 당시 교육부총리가 가포고를 직접 방문하여 상황을 챙겨보고, 몇 주 후 유인종 당시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한 서울 교육계 인사들이 방문해 성금과 지원 물품 등을 전달하며 빠른 복구를 도왔다. 이에 그해 12월 중순 피해 복구가 완료되어 다시 학교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가포고 곳곳에 놓여있는 5개의 석물(인의예지·무한불성·깊은 물은 고요히 흐른다·불성무물·산처럼 바다처럼)도 그때 설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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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의 가포고등학교 전경. 좌측에 보이는 건물부터 순서대로 체육관, 별관, 식당동(상), 도서관동(하), 본관(오른쪽 흰 건물), 신관(오른쪽 맨 끝 벽돌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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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간 별관(현 종합관) 지붕. | 피해 상황을 살펴보는 윤덕홍 교육부총리(사진 가운데). |
한편 증가하는 입학생과 이에 따른 시설의 확장 요구를 반영하기에 기존의 학교시설은 매우 부족했다. 이에 학교에서는 2003년 강당 개축, 2004년 도서관 리모델링, 2006년 건물·운동장 스탠드 전체 도색 등 시설 면에서의 변화를 꾀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공간 부족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기에 2006년부터 도교육청의 완고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새 교사 건축을 끊임없이 건의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로 임대형 민자사업(BTL) 방식의 건축이 확정되었다. 이에 2008년 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신축 공사가 진행되어 지금의 본관이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학교장을 비롯한 가포인들의 요구로 기존에 현재의 도서관 절반 정도의 위치까지 짓는 것으로 예정되었던 건축 면적이 현재 수준으로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안정적이고 규모 있는 본관을 준공할 수 있었다. 기존에 신관(현 별관) 앞에 있던 본관, 현 본관 예정지에 위치했던 도서관동과 주차장 위치에 있던 식당동은 전체 철거되었으며, 별관(현 종합관)은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교육과정 면에서의 변화도 주목할만하다. 가포고는 부족한 역사를 상쇄하기 위해 개교 초기부터 수 차례 연구학교를 운영해왔고, 이를 통해 체험활동과 동아리의 중요성이 (비교적) 인정되는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효율적 수업’과 ‘수준별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제7차 교육과정(2002년 신입생부터 적용)의 결과로 가포고에도 수준별 교육과정, 즉 성적에 따라 모든 과목의 학급이 달라지고 학사를 차등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체계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지금 들어 매우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되나 당시에는 일종의 유행으로 전국에 도입되었고, 가포고 역시 개교 초기에 비해 줄어드는 ‘유명 대학 진학자 수’를 늘리기 위해 이러한 유행 대열에 동참하며 교과교실제, 우열반, 집중반 등 교육과정적 변화를 대거 겪었다. 기존에 별관 1층에 있다 올해 리모델링 과정에서 사라진 영어교실과 5층에 있던 수학교실 등이 이때의 흔적으로. 최근까지도 남아있었다. 그때까지의 짧은 역사를 되돌아보고 여러 가지 면에서의 변화를 통한 이후의 미래를 기대하며 2006년 만들어진 책자 「가포십년사」는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보존되어있다.
한편 지상 4층 규모의 식당동은 경남체고가 있을 당시 기숙사로 사용되었으나, 개교 이후 논의에 따라 성적 차별에 따른 기숙사 배정의 불합리성 및 교원 근무 여건 개선 등을 사유로 교실 등으로 용도를 바꿔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건축물대장에 따르면 도서관동 및 식당동의 철거와 동시에 창고 2개소, 소강당 1개소, 기계실 2개소가 함께 철거된 것으로 보이나 이들 건물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료의 한계로 알 수 없었다.
새로운 본관 시대, 운영 안정기 (2010~2016)
본관으로 교장실·교무실·행정실 등의 시설 이전을 지속적으로 거친 후인 2010년, 드디어 지금의 본관 시대가 열렸다. 본관에는 모든 1~2학년 교실과 자율학습실 등이 들어왔으며, 소강당(갈마홀) 등 여러 집회 및 편의시설도 설치되었다. 본관에는 당시로선 흔하지 않았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다른 기존의 건물들에 비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었기에 학생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다. 물론 선도부(현재의 질서안전부)에서 학생 사용을 수시 단속하는 등 자유로운 이용은 어려웠지만 부상자 이송이나 물건 운반의 편의성이 대폭 개선되었다는 점만으로도 큰 변화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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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경 촬영된 가포고 전경. |
교육과정 면에서도 기존의 우열반을 대체하는 제도로 학습부진아 대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시대적 흐름에 맞는 잔잔한 변화를 꾀했으며, 논술 등 다양한 유형의 진학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동아리 활동의 경우 2000년대 초에 들어 지속적으로 그 중요성과 학교 교육과정에서의 위상이 줄어들다 이 시기에 다시 소폭 반등하게 되는데, ‘교과 수업과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부차적 활동’이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아 교과 중심 동아리 위주에 체험 및 자율활동 중심 동아리가 부가적으로 편성되는 체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러한 체계에서 성공적으로 탈피하여 학생의 행복하고 자율적인 성장을 촉진하고자 경남형 혁신학교의 준비단계인 ‘행복맞이학교’를 신청, 2016년 동아리형 학교에 선정되어 다시 동아리활동 투자를 늘리고 시설을 확보하는 등 이후 시대의 교육문화 확립을 위한 노력도 지속되었다.
또한 개교 20년을 앞두고 교복이 지금의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성차별적 요소 시정을 위해 치마 교복을 없애고 긴바지로 일괄 통일하였으며, 조끼도 정장식에서 니트로 바뀌어 시류를 따랐다. 하복의 경우 큰 변화 없이 그대로 흰 반팔 셔츠에 긴바지 차림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새로운 교복 디자인은 학생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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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여학생용 교복. | 구 남학생용 교복. |
한편 가포인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온 가포고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주요 기록물을 공식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될 때 도교육청의 역사관 설치 지원 사업이 전폭적으로 시행됨에 따라 2012년 본관 3층에 교실 0.8칸여 규모의 역사관이 만들어졌다. 역사관은 현재 개교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교직원 명단, 교복과 체육복, 수상 기록, 교지 및 동아리지 등 121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이는 진주여자고등학교(1,132점), 밀성초등학교(1,815점) 등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학교들에 비해서는 적은 수치이나, 개교 시점을 고려할 때 자료 수집을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지속되는 학생 수의 감소를 이곳도 피할 수 없어 2000년(제2회) 720명에 달했던 졸업생이 2017년 2월(제19회)에는 213명에 불과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류에 따라 본교 교사 수도 동반 감소하였다. 그러나 그 세월, 특히 운영 안정기를 거치며 가포고는 우리 고장의 당당한 인문계고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전한 정치적 약자, 학습환경 보호 및 이전 반대 투쟁기 (2016~2019)
안정적인 운영을 펼쳐가던 가포고에 또다른 시련이 당도했다. 가포신항을 필두로 한 산업용지 개발, 그리고 그 사건이 영향을 미친 가포고 이전이 그것이다.
2005년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계획 수립과 가포만 준설을 통한 공사에 착수, 2013년에 잡화부두로 개장한 가포신항은 개장 이후까지도 학교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존 가포 어촌의 파괴와 가포만 조망의 어려움 등 풍경과 추억이 사라지고 변하는 데 대한 가포인들의 아쉬움은 컸으나, 부두 자체가 수업 등 학교 활동에 미치는 현실적인 문제는 미미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므로 곧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개장 2년 반가량이 지난 2016년 3월, 학교와 불과 80여m 떨어진 거리에 공장이 지어지고 곧 가동을 시작하며 가포고는 논란 속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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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립 이전의 가포만과 바다 바로 앞의 가포고 교정. | 매립 후 가포신항이 들어선 모습. |
여러 요즘의 가포인들이 수업 중에 “쨍! 떨그덩!” 하는 큰 소리를 듣거나 가끔 불쾌한 페인트 냄새가 학교 안에 퍼져있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근처 금속 가공 공장에서 작업 중 발생하는 소리와 냄새다. 방음벽조차 없던 당시에는 그 강도가 더욱 심해 결국 공장 가동 이후 문제 제기가 빈발했고, 학부모가 중심이 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진상조사 요구, 시청 앞 집회 등 문제 제기를 펼치게 된다. 당시 화살은 환경을 최우선시해야 할 학교 근처에 공장 인허가를 승인한 창원시로 돌아갔고, 이후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 내 설치 가능 여부 조사, 업종제한 검토 및 교육기관과의 협의 등 필요한 절차가 미이행되거나 졸속으로 끝났음이 밝혀져 담당 공무원이 문책되는 등 행정적 조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준공하여 생산에 돌입한 공장을 철거하기는 어려움이 있어, 분진 및 소음 유발 가능성이 큰 작업장을 학교에서 좀 더 멀리 떨어뜨리고 운동장에 방음벽을 설치하는 등의 조치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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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환경 및 학습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청 앞 시위. (ⓒ 경남도민일보) |
반쪽짜리 승리나마 거두고 난 후에 가포인들은 학교가 다시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곧 또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지역 내에서 매우 큰 불씨가 되었던 2018년의 ‘가포고 북면 이전 추진’이다. 당시 북면지구는 여러 신축 아파트의 준공으로 학생 수가 크게 늘어난 상황이었으나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까지 통학 시간이 왕복 2시간에 달하는 등 고등학교 교육 여건이 불편했다. 이에 북면 주민들과 교육계는 지역 내 고등학교 신설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예산 효율화 등을 위해 전체 고등학교 수를 더 이상 늘릴 수 없게 규정한 ‘학교총량제’로 인해 한 학교는 폐교 또는 이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교육청은 그 대상으로 가포고를 선정했다. 표면적인 선정 이유로는 상기한 환경 문제와 학생 수 부족 등이 제시되었으나, 실상은 구 마산 지역의 사립 고등학교들이 시설 투자비 등을 이유로 이전에 난색을 표하자 비교적 동문이나 학생의 정치적 힘이 약했던 우리 학교가 타깃이 된 것이 명백했다. 현동, 가포택지지구 등으로 근처 고교생 수의 증가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일단 가라’는 명이 내려진 것이다.
일방적인 북면으로의 이전(말이 이전이지 사실상 폐교에 가깝다) 통보를 받은 가포인들은 분노했다. 2000년대 중반 유명무실해졌던 동창회가 초창기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고, 그곳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가포인들은 십시일반 갖고 있는 재능과 시간, 재정을 모으며 유튜브 운영, 신문 광고, 교육청 앞 집회, 서명운동, 학교에서의 토론회 개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포고 이전의 부당함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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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선배들이 협업하여 만든 <가포고TV> 콘텐츠. | 2018년 7월 도교육청 앞 집회. (ⓒ 경남신문) |
또 지역의 정치인 및 전문가와 협력하여 지속적으로 이전 문제를 주류 의제로 견인, KBS <감시자들>에서 가포고 이전에 관한 비판적 논의가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등 가포고 이전이 지역의 생존이 걸린 공익적 문제임을 알리고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가포고를 거쳐 은퇴하셨거나 은퇴를 앞두고 계신 원로 교사들(김성권·정헌 선생님과 교가 작곡자이신 최수자 선생님 등)도 학생들의 투쟁에 열정적으로 동참하며 힘을 보탰다. 한여름 불볕에 십대의 학생들과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이 학교를 지키고자 함께 서명운동을 벌이는 모습은 지역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하여 반발 기류가 극심해지자 추진을 강행하던 교육청 측에서는 이전을 위한 주민투표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며 각종 절차를 연말로 연기하는 등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비상대책위원회는 몇 달에 걸쳐 교육감을 비롯한 관계자들과의 면담과 언론 대응 등을 통해 절차 재개 이전까지 상황을 마무리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그렇게 2018년 11월 12일, ‘이전을 관철할 것’임을 언급한 지 수 개월 만에 교육감께서 스스로 이전 철회 의사를 밝히며 지난했던 장외투쟁이 승리로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교육청은 북면에 학교를 아예 신설하는 쪽으로 노선을 크게 변경했고, 학교 건설과 운영에의 자체 재정 투입 약속 등을 통해 교육부의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하며 학교총량제를 뚫고 2021년 북면고 신설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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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가포고에서 열린 토론회. (ⓒ 경남도민일보) |
투쟁의 과정에서 강정한·윤영준(이상 법무법인 더킴로펌)·박종찬(前 고려대 총학생회장)·정창식·이주철·김승재(이상 전현직 동창회장)·한기현(창원시검도회)·김태환(국회)·박민준·제동진·방태양·조소민·양지호·이승후·김수민·장선미·손가용 선배 등 많은 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가열찬 활동을 전개했다. 이 지면을 빌어서라도 감히 재학생들을 대표해 훌륭한 선배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더 많은 분들의 이름을 싣고 싶으나 지면과 정보력의 한계로 성함을 올리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대사건을 겪고 난 후 가포고의 운영 궤도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고, 함께한 시련은 가포인들을 더 끈끈하게 엮는 촉매가 되었다. 이에 학교의 발전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약, 가포고의 지금 (2020~)
그러나 그런 투쟁의 성과가 무색하게도 전 세계에 불어닥친 코로나19 범유행의 바람으로 인해 그간 쌓아온 기반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했고, 실제로 일부는 그러했다. 그러나 가포인들은 굴하지 않고 또다시 시대에 맞는 변화를 추구하며 학교를 지켜나갔다.
교육과정상 가장 주된 변화는 고교학점제의 전폭적인 도입이다. 정부 기조로 2018년경 일부 학교에서 연구 형태로 시작해 이후 전면 도입이 확정된 고교학점제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의 거부할 수 없는 시류가 되었다. 이에 마산가포고는 교직원들의 숙의를 거쳐 2021년 관내 학교 중 시범적으로 고교학점제를 교육과정 속에 녹여내기 시작했는데, 이후 학점제의 전면 시행이 2025년에서 2023년으로 2년 앞당겨지게 되며 더욱 선구적으로 행동한 격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더 일찍 학점제를 도입하며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공동교육과정 수업을 개설·운영하며 다른 학교와 교육자원을 공유하는 등 지금의 가포고는 지역의 학점제 준 거점 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시설 역시 다시 한번 새로이 바뀌었다. 별관 한지에 위치하던 도서관이 본관 1층으로 이동하여 탁 트인 조망 속에서 사색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며, 현 도서관 위치에 있던 행정실·교장실·시설관리실 등은 별관 1층의 구 영어교과실 자리로 이동하여 접근성이 대폭 개선되었다. 또 2021년부터 정부 그린스마트미래학교 사업의 일환으로 본관 학습카페 및 다목적실 시공, 별관 메이커스페이스 개설, 별관 엘리베이터 시공과 전체 리모델링 및 ‘해담솔관’으로의 개칭 등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며 근처 학교 중 가장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시설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 출입로 보-차도 분리와 교문 재설치, 본관 분리수거장 시설 보강 등으로 안전 면에서도 한 단계 높아진 수준을 갖게 되었다.
선후배간의 관계도 조금씩이나마 더욱 끈끈해지고 있다. 2022년 가포고 개교 당시 함께하신 황성효 선생님께서 교장으로 부임하시며 학교의 대공사가 더욱 가열차게 추진됨과 동시에 선후배 간 연결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이후 동문회 차원에서 학교 스포츠리그인 갈마컵에의 상금 및 트로피 후원 등 물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학생 문화의 발전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으며, 동문회장 선배께서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학교의 실질적 운영 과정에도 긴밀히 관여하고 있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학생자치 문화의 부활이다.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운영을 넘어 학생회가 학생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됨에 따라, 작년 한 해 학생회는 부서 정비 및 부원제 실시, ‘민원의 날’ 등 직접 참여 사업 운영, 학생이 중심이 되는 교지의 부활, 이에 따른 예산 확충 등 이전까지 기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재도약을 겪었다(고 자평한다). 특히 작년 학생회장단 선거에서 본교 역사상 최초로 실시한 후보자토론회가 지역의 양대 신문(경남도민일보·경남신문)에 보도되는 등 가포고의 학생자치 활성화 과정은 점차 지역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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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총동문회 주관 제1회 갈마컵 시상식. | 2023년 10월, 학생회 제2회 민원의 날. |
2024년, 가포고는 개교 30년을 한 해 앞두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과제와 가능성들이 가포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을 택하고 해결하며, 우리의 소중한 가포고는 또 한 번 역사를 이어가게 될 것이다.
자, 이제 그대들의 차례다. 약사가 아니라 언젠가 어엿한 정사를 편찬할 수 있을 때까지, 이곳의 역사만으로 한 권의 완결된 책을 낼 수 있을 때까지, 또 그 이후까지, 그대들, 그리고 그대들이 키울 다음 주자들이 가포고를 가열차게 이끌어주길 바란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인 사료가 될 교지 「해담솔」도 소중히 지켜주길 간절히 바란다.
숙원을 하나 이루고 떠나려 하니 분명 통쾌해야 하나 이곳에서의 따스한 추억에 눈물이 앞선다. 그러나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이제 바톤을 넘긴다. 모두들 잘 부탁한다.
< 참고 자료 >
「架浦十年史」 (2006)
「창원대학교25년사」 (창원대학교25년사편찬위원회, 창원대학교, 1995)
「한국현대초등교원양성교육사」 (김영우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경남교육 70년사 제1권, 제2권」 (경상남도교육청, 2018)
“馬山敎育大學과 昌原大學校의 연결고리”, 창원대신문 이차리, 2018. 04. 16.
“40년전 마산사람 연애 1번지 가포의 모습 기억 하시나요?”, 경남신문 김유경, 2015. 01. 08.
“특수高 합격 버금 「高入공포」”, 부산일보, 1996. 01. 24.
“교육계도 창마진 통합 준비”, 부산일보 정태백, 2010. 01. 19.
“마산가포고 "학교 앞 공장 허가, 창원시 나서라"” 2016. 05. 16.
“마산 '가포고 10년사' 발간”, 경남신문 정오복, 2007. 04. 03.
“가포고 옆 88m 금속가공 공장, 특단 조치하라”, 경남신문 김재경, 2016. 08. 31.
“마산가포고, 에스에이에스 SAS(주) 장학금 전달식 가져”, HY인산인터넷뉴스 최정현, 2017. 08. 02.
“마산가포고 북면신도시 이전 추진”, 경남도민일보 이혜영, 2018. 07. 04.
“창원 북면신도시 고교설립과 백년지대계”, 경남일보 이은수, 2019. 12. 23.
2000. 04. 08. 자, 2003. 10. 01. 자, 2003. 08. 28. 자, 2005. 08. 04. 자 <경남신문>
2001. 06. 28. 자 <경남도민일보>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창원 대학교”, “가포동”
국립창원대학교 박물관, 역사관 소장 자료
마산가포고 총동문회 밴드(430143972, 430143978, 430143944, 430143943, 430143859, 430143853, 430143964 등)
* 취재 및 집필 시간이 충분치 않아 글이 깔끔하지 못한 데 대해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양해를 구합니다. 아울러 사료의 한계로 작성 과정에서 추측성 서술이 일부 가미되었고, 이에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양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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