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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 소식/240326 마산가포고 교지 <해담솔 특별호>

마산가포고 <해담솔 특별호>, 교지를 향한 대장정

by Teddybear 2025.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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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해담솔 특별호」 (2024. 02.) 11~18P의 내용을 전재한 것입니다.

 

 드디어 해담솔 특별호가 세상에 나왔음이 그저 감동스러울 뿐이다. 이 교지를 만들기 위해 지난 11월부터, 준비 기간까지 고려하면 7월부터, 교지를 되살리리라 고민했던 기간까지 고려하면 입학 직후부터 3년여를 고대했다. 거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 교지를 부활케 해준 모두는 정말 퍽 해담솔이란 이름과 맞다. 바다를 마주한 소나무. 풍랑과 해풍, 찢어질 듯 쏟아지는 햇살과 제 뿌리를 지탱하는 기암의 차가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한자리에 서있는 해담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 그리고 앞으로 이 교지가 다시 한 번 뿌리내리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우리 교지에 담긴 나름의 역사와 이 교지를 부활시킨 계기에 관해 몇 자 적어본다. 

 

가포의 역사, 해담솔

 아무리 마산에서 가장 막내라 한들 벌써 개교 30년을 한 해 앞두게 되었다. 그 시간동안 교지 「해담솔」은 명실상부 가포의 소식을 전하고 학교의 틀을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오며 학교의 대표적인 매체로 기능해왔다. 때론 학생들의 소통 창구와 학생과 교직원 간의 가교로, 또 때론 학급 단합을 위한 광장으로, 종종 사회적 이슈에 관한 정제된 토론을 진행해주는 아고라로… 졸업을 하고 시간이 지나선 소중하고 따스했던 가포에서의 추억과 십대 그 자체를 상기시켜주는 하나의 촉매제가 되어준 것이 바로 「해담솔」이었다. 

 

 동아리나 학급 소식 등 기본적 언론 기능에 더해, 시사에 관한 학생들의 흥미로운 견해가 드러나거나 문학적 재능을 뽐내는 기사들도 더러 있었다. 내가 조사했던 이전의 교지들에서 정말 흥미로웠던 기사가 몇 개 있었는데 제자와 결혼한 선생님 이야기, 신혼을 맞은 선생님 댁에 찾아가 이것저것 조사하는 이야기, 방학 때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4.3사건 등 제주 지역 유적을 탐방한 이야기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렇듯 시간이 지나더라도 당사자에겐 따스한 추억이나 재미난 회상을, 후배들에겐 꿈과 역동성을 일으켜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교지 「해담솔」이었다. 

 

학생 매체의 상실과 부활

 그러나 이유 모를 사정으로 우리의 매체는 줄어들길 계속하다 결국 사라졌다. 2017년 마지막으로 잡지 형태로 발간된 해담솔은 그 다음 해부터 A4지 몇 장에 담긴 ‘학교신문’으로 바뀌었다. 물론 좀 더 주기적으로 학교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는 공감할 수 있으나 동아리 등 비교과 활동의 대폭 축소로 인한 영향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신문마저도 2020년을 마지막으로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이, 또 대안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담당 교사의 업무 부담, 비교과 활동에 대한 관심 저하 등을 지레짐작했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크게는 ‘학생의 지근거리에서 학생의 소리를 전할 공적인 매체’가 상실되어 우리 학교의 운영을 좀 더 다채롭고 효과적으로 이끌, 교육주체 사이의 거대한 교두보가 무너졌다는 데 있다. 특별한 재능, 학교에 바라는 것, 우리 삶의 기록 등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재생산할 공간의 역할은 학교를 ‘삶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만드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즉 그러한 공간 없이는 궁극적으로 교육공간의 역할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했고, 입학하고 학교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동시에 ‘언젠간 내가 이 매체를 부활시키는 데 역할을 다하고 싶군’ 하며 생각했다. 우리 학교에 잠재력, 또는 이미 드러나는 재능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단지 나 혼자 알고 개인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소비하다 학교를 나오기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래서 기회가 오기를 고대하며 마음속에 꽤나 오랜 염원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로, 교지를 만들기로 했다

 기회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학생회장이 되었다. 운이 좋아 단일 후보가 되어 선거 경쟁에 대한 부담감 없이 내가 원하는 정책을 마음껏 설계하고 선보일 수 있었고, 그때 내가 ‘정책 중심의 학생회 경영’을 할 것임을 유권자들에게 못박았다. 그 이후로 서서히 소문을 퍼뜨렸다. 항상 입버릇처럼 ‘교지를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하고 얘기하며 다녔고, 내 나름의 계획을 슬슬 흘리고 다니기도 했다. 다들 사는 게 바쁘다보니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몇몇이 내 ‘원대한 계획’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엔 그 소문을 공공을 위한 정책으로 정제해 대의성을 얻었다. 학생회는 운영계획에 따라 돌아가기에 단지 나 혼자 뭔가 만들겠다고 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그래서 운영계획 수정안을 6월경에 마련하고, 운영위원회를 거쳐 7월의 대의원회에 안건으로 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교지를 같이 만들 사람도, 뽑을 돈도, 프로그램이나 기삿거리 등 환경도 없었다. 유이하게 있었던 것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또 이런 작당을!” 이라는 유구한 비판과 어쨌든 내가 오랜 시간 고대해오던 것을 꼭 해야겠다는 나의 깡 넘치는 의지 정도. 개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예산이었다. 본래 있었던 돈을 더 늘리는 것은 그나마 할 만하지만, 올해 예산에 아예 없었던 항목을 완전히 새로 만드는(그것도 한두 푼이 아닌 것을) 작업은 몹시 난감했다. 학생회 내에서 나를 제외하고도 이 일에 관한 필요성을 느끼는 임원은 몇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부서에다 일을 더 더할 수는 없었고 우리가 그런 일을 집행할 명확한 권한도 없었다. 그렇다고 많은 업무로 더 뭔가를 맡을 여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들을 ‘예산 계획 좀 해주세요’ 라며 잡아두며 결례를 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 생각했다. ‘에이, 뭐… 그냥 내가 해보자!’ 하고 말이다. 그 길로 학생회 산하에 TF를 설치할 계획을 짜고 예산요구서를 만들었다. 그것들을 인쇄해 세 달여를 교무실, 교장실, 행정실을 뺀질나게 드나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렵겠는데…’ 라는 의견이 나오면 밤늦게까지 그 부분을 보완해서 그 다음 날에 ‘이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찾아갔다. 계획을 접한 모두가 취지와 기대 효과에는 공감해주셨지만 행정적인 사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였기에 그 부분에서 사소한 충돌이 있기도 했다. 다행히도 교장선생님의 적극적인 협조로 10월경 학교에 남는 예산을 긁어모아 우리 쪽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 TF원을 모집했다. (형식상으로는 학생회가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이름은 ‘학생회지 TF’라 쓰고 공고를 냈다.) 10월 23일부터 31일까지라고 공고를 내놓곤 많이 고민했다. 짧은 모집 기간도 기간이지만, 세상에 굳이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기에 혹여나 다들 무관심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한 것이다. 이전처럼 비교과가 진학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TF에서 활동한다고 급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TF의 시작···

 모집 마감 시점, 그렇게 긴장된 마음을 안고 결과를 봤다. 열일곱 명. 면접을 봐서 절반 정도 떨어뜨리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내게는 굉장히 적은 숫자였다. ‘인원이 너무 적겠는데, 이런…’ 하면서 지원 내역을 봤다. 

 

 교지의 (나름) 성공적인 부활이 결정된 때가 그때였지 않을까 싶다. 모두가 너무 훌륭했다. 내가 아는 친구들도 있었고 모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구글 폼에 달아준 것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그것만으로도 이 조직이 충분히 잘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도 뭔가 부족함이 많은 지원자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아무도 없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겉으로도 이상한 사람마냥 연이틀을 실실 웃으며 다녔다. 그냥 아무도 떨어뜨리지 않고 모두 함께하기로 하고, 역사적인 TF의 첫 모임을 그렇게 열게 되었다. 

 

 아이들은 역시 좋았고, TF는 꽤나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했다. 매주 화요일 7교시, 가장 집에 가고 싶을 시간에도 아이들은 모두 함께해주며 나의 문제의식과 목표에 공감, 투박한 그것을 잘 다듬어주며 나아갔다. 1시간 남짓의 짧은 회의 시간에도 우리는 서로에 관해 알아가고 그것을 공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데 집중했다. 회장단 활동을 응원해주시는 학생들이나 해담솔에 관한 경험이 있는 선생님들께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표해주시며 격려해주셨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오래된 옛날 교지들을 역사관에서 찾아와 함께 읽고 분석하는 모임을 하기도 하고, 회의에서 결정한 사안에 관해 심층적인 논의나 즉각적인 작업이 필요하면 참석자들이 자원해 학교 밖에서 자정이 되도록 일하기도 했다. 

 

 기존 교지들이 취재만 학생에 의해 이루어지고 편집 등은 업체에 맡겼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 TF에는 거의 전권이 있다는 것을 십분 이용하여,‘학교 소개-관리자 축사-학생회장의 뻔한 인삿말-진학 실적 자랑’ 등으로 이어지는 ‘노잼’ 구성은 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여 진짜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콘텐츠는 무엇인지, 우리가 본받을만한 인물은 누구일지, 공모전은 어떻게 진행할지 등을 자유롭게 고민하고 결정하며 점점 자부심과 애착이 붙어갔다. 



···과 여러 난관

 그러나 어려움도 있었다. 역시나 시간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실무적인 기반을 닦기 위해 걸린 시간이 꽤나 길어 정작 TF 구성은 겨울방학 직전에나 할 수 있었고, 그래도 방학식 때 교지를 나눠주어야지 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모집부터 제작, 발간까지 7주라는 무모한 기간을 계획으로 잡았다. 결과적으로 20주 가량을 꼬박 교지 제작에 쓰고도 학년도를 넘겨 발간하게 되었으니 정말 시간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시간 속에 3학년은 수능이, 다른 이들은 정기고사와 각종 수행평가가 끼어있었으니 그마저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곧 겨울방학식에 배부하는 건 무리라는 것을 12월 초순이 되어 깨닫고 계획을 수정, 그나마 시간이 좀 더 나는 방학 내내 열심히 만들어 개학식즈음 새로운 가포인들에게도 선보여주자는 쪽으로 선회했다. 

 

 금전 역시 문제였다. 예산을 받긴 했으나 TF 내에서 쓰는 기본적인 간식비나 교지 인쇄비 등이 항목의 전부였고, 그때그때 발생하는 잡지출(인쇄용지같은 사무용품부터 인터뷰 과정에서의 찻값, 회의가 늦어질 때의 식대 등 제작에 필요한 각종 비용까지)을 공금으로 쓰려면 기존 예산안을 깨고 다시 항목을 만들고 돈을 받아오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기에, 그냥 나나 다른 아이들의 사비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특히 하윤이. 내가 50여 만원을 쓸 동안 하윤이는 130만 원이 넘는 돈을 써주었다. 고맙다···) 무언가를 열심히 했다는 관용구로 쓰이는 ‘피와 땀이 섞였다’는 말은, 몇몇의 끈질기고도 고통스러운 임금 노동을 통해 받쳐진 이 교지에서 실제가 되었다. 

 

 더하여 운영상의 문제도 있었다. 아무리 우리의 투박한 손으로 직접 만드는 잡지고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한들 최소한의 질은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기사 기획, 작성, 윤문, 배치, 편집 등 여러 가지 기능을 익히고 활용하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 와중에 불참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지에 관해서 등 운영상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러 부침이 있었고, 기존에 두어 달 동안 쭉 달려온 피로감이 거기 더해져서 1월 중순부터 업무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마감은 우리의 사정 따위 개의치 않고 점점 다가왔고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기만 했다. 

 

다시 하나되어

 그러나 그러한 위기는 곧 성장을 위한 아주 질 좋은 양분이 되어 우리를 더욱 뭉치게, 또 커지게 만들었다. 다함께 마음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기존에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나 형성되어온 TF원 간의 친목, 그리고 학년이나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솔직히 의견을 말하는 회의 문화가 문제의 빠른 봉합에 기여해주었다. 좀 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여정을 지지부진하게 만드는 몇 가지 요소들을 과감히 내버렸다. 

 

 그리고 다시 할 일을 시작했다. 2월 초부터 작업 속도에 불이 붙었다. 물론 나의 일도 몇 배로 늘었지만 개의치 않고 묵묵히 행했다. 특히 복병이었던 인터뷰와 공모전을 어찌저지 마감하고 들어선 편집 과정이 계획보다 더 오래 걸리는 바람에 2월 중순부터는 개인 시간을 모두 반납하고 하루에 10시간여를 편집에만 몰두했다. PC방 비용으로만 거의 20만원 가까이를 썼다. (희향이를 비롯한 편집팀원들이 이때 나와 함께 정말 많이, 또 열심히 일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교지 인쇄비 등 반드시 써야 하는 잔여 예산을 재정 출납 마감 당일에 아슬아슬하게 지출하는 등의 짜릿한 경험이나, 기존에 짜놨던 계획상 일자에 맞추기 위해 편집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발간 기념 자축식’을 여는 등 재미난 경험도 더러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3월 중순이 되어 교지가 완성되었다. 곧 모든 가포인들에게 돌아가, 앞으로 계속 순환할 소중한 교지가 춘삼월이 되어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학 입학을 하고도 3주 가량이 지나서야 드디어 가포고 교문을 나서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이상한 놈이다. 물론 방학을 모두 반납하고 나와 함께 작당해준 우리 TF원들 역시 그러하다. 특히 희향이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그마한 아쉬움

 「해담솔 특별호」는 그냥 하나의 전문 잡지나 기사집이라고 봤을 때에는 부족함이 많다. 일차적으로는 교정교열팀원들이, 다음으로는 나를 거치며 나름대로 수 차례에 걸쳐 윤문을 한다곤 했으나 여전히 실수가 보이는 부분들이 더러 있고 문맥이 맞지 않는 곳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하게 학생들의 힘으로 부활시킨 것임을, 또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결과적으로 교지 발간에 성공했음을 감안했을 때 독자들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리라 믿는다. 자평하건대 그럼에도 다른 학교, 특히 특목·자사고 등지의 교지와 비교하더라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꿇리지 않는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운영상의 부족함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자체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존재한다. 첫째로 학생회 중앙 조직을 제외한 동아리 등의 학교 내 자치조직에 관해 지면에 충분히 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의 해담솔을 비롯해 대부분의 교지에서 동아리 소개와 홍보, 또 그런 활동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코너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번 교지에서는 학교 내에서의 동아리활동의 위상이 아직 바로서지 못했고 시간적 여유 역시 나지 않음에 따라 그런 코너를 만들지 못했다. 물론 차기 교지에서도 수십여 개에 달하는 여러 자치조직을 모두 다룰 수는 없겠으나, 우리의 문화가 곧 학교의 문화이니만큼 개중 일부라도 심층 취재를 해주기를 고대한다. 

 

 둘째로는 가포고의 역사를 만들어온 선배들을 많이 취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지 맨 앞의 <가포약사>에서도 간략하게 다뤘지만 가포고를 거쳐간 이들은 법조계, 문학계, 경영계, 체육계 등 정말 다양한 경로로 진출해 사회에서 빛나는 성과들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재학생들이 그런 멋진 모습들을 알지 못하여 우리 학교의 속칭 ‘아웃풋’이 일천하다는 자조적 인식이 학교 내에 널리 퍼져있었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이에 훌륭한 선배들과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의 오랜 조사를 거쳐 인터뷰 후보들을 많이 정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지역 차이로 인한 만남의 어려움과 시간 부족 등으로 실제 인터뷰로 이어진 것이 한 분에 그치게 되어 너무나도 아쉬웠다. 이번 교지 제작 과정에서 물색해둔 좋은 선배들을 차기 교지에서 원없이 취재해주어 동문들의 든든함을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주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셋째로는 이 교지가 ‘학생은 공부만 해야 하는 존재’라는 기존의 인식을 타파하는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교지가 ‘노잼’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성세대의 구시대적 인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콘텐츠가 주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시대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잘 전해줄 인터뷰이를 물색하며, 진학과 진로의 비중을 일 대 일로 두거나 혹은 진로 쪽에 좀 더 신경을 쓰려 했다. 더하여 진학 분야에 있어서도 전문대학 등 여러 유형의 진학자들을 취재하고자 하는 강한 소망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놓인 운영상의 과제가 너무 많아 마지막까지 그 소망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음을 대단히 애석하게 생각한다. 물론 이필우 선생님을 다룬 기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는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또 본인의 과거 토론·발제 등을 바탕으로 우리 교육을 총체적으로 비평하는 칼럼을 한 편 싣고자 했으나 다른 기사를 관리하며 도저히 집필의 여유가 나지 않아 기고하지 못했는데, 차기 교지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학생의 진짜 본질은 무엇이며, 교과 성적이 곧 사회적 행복이 된다는 기존의 가치관이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논제에 관한 양질의 비평문이나 인터뷰가 많이 실리길 개인적으로 간절히 바래본다. 

 

 이것 이외에도 보강이 필요한 여러 측면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나, 그러한 생각들을 분석하여 글로 녹여낼 시간이 없다. 또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이 교지가 이미 훌륭하기 그지없으므로, 노파심 가득한 나의 말은 이만 줄여본다. 

 

해담솔을 피워준 분들

 많은 가포인들께서 이 해담솔을 되살리는 데 여러 종류와 크기의 도움을 주셨다. 그 형태에 관계없이 우선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분이 몇 분 계셔서, 마지막으로 짧게나마 언급해본다. 

 

 가장 먼저, 교지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의기투합해준 우리 TF원들에게 감사하다. 정기회의만 열다섯 번, 팀 회의나 즉석에서 만나 회의가 되어버린 각종 모임들을 포함하면 족히 쉰 번은 되는 만남의 시간 동안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성실하고 훌륭하게 수행해주었다. 나 홀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렇게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동료 TF원들의 노력과 재능 덕분임을 확신한다. 나름 다년간의 조직관리나 실무 경험을 쌓아본 내가 여태껏 해본 일 중에 가장 즐거웠던 일이 이 교지 제작이었고, 그 즐거움의 가장 큰 원천이 우리 아이들이다. 주위에서 싫은소리도 종종 듣고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도 자꾸만 올라왔을 터임에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나아가준 너희··· 다들 너무 좋은 아이들이라 내가 뭐라 응원하지 않아도 잘 살 것이 확실하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그대들의 본판과 합쳐져 분명 살아가는 데에서 어디든 정말 큰 역할을 하리라고 내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확언한다. 

 

 더하여 인쇄 단가 상승 등으로 기존에 편성된 예산으로는 인쇄를 진행할 수 없게 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십시일반 소중한 마음을 보태주어 교지가 정상적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도현, 준희, 동건, 현민, 지환, 승욱, 태민, 시헌, 민제, 채현, 재헌이를 비롯한 가포의 아이들과 거금을 쾌척해주신 유성상 교수님께 진심을 가득 담아 감사함을 전한다. 학교 안팎으로 늘 나를 도와주던 분들께 마지막까지 도움만 받다 가니··· 미안함과 감사함에 마음 한켠이 시큰해진다. 모두들 앞날에 늘 창창함만이 가득하시길 바란다. 

 

 다음으로 박주영 선생님께 대단히 감사드린다. 학생들을 사랑하시는 마음만큼 일도 정말 많이 하고 계시는 선생님께서는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TF 지원역을 자청, 행정실의 정세연 선생님과 함께 예산 집행 등 행정 사항 전반에서 큰 도움을 주시며 자칫 무너질 수 있었던 TF의 운영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주셨다. 그러시면서도 힘들어하시는 내색이나 우리에 대한 원망 없이 늘 교지 제작을 응원해주시고, 교지가 학생 매체로 잘 기능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자율성을 최우선시해주셨다. 그분께 받은 도움을 나열하자면, 특히 몇 년간 쌓인 개인적인 감사함을 전하자면 정말 끝도 없겠으나 공적인 지면이니 이 정도로 줄여본다. (남아있는 아이들아, 우리 주영 선생님을 꼭 잘 모시도록…) 

 

 또 장윤정 교장선생님과 윤정식 교감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두 분께서는 교지 제작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관해 설명드리는 동안 전혀 귀찮거나 부정적인 내색을 보이지 않으시고 늘 끝까지 경청해주시며 지원을 약속해주셨다. 실제로 학교 운영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로 늘 정말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연초 예산에 편성되어있지 않던 교지 인쇄 예산 확보를 위해 여러 부서에서 예산을 확인해주시고 직접 모아주시는 등 교지 제작을 위한 행·재정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셨다. (그 과정에서 감사하게도 변범부 선생님께서 흔쾌히 당신께서 관리하시는 예산을 내어주신 덕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호를 기점으로 다시 교지가 학교의 대표 매체로 안착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예산 편성과 교원을 통한 행정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기틀을 확립해주셨다. 

 

 마지막으로 이 교지를 읽어주고, 또 이어줄 가포고의 아이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그대들은 이 교지의 이유, 목표, 원동력, 가치, 주체, 객체, 무대다. 물론 나에게도 그래왔고,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쭉 그러할 것이다.

 

 너무 좋아 때론 행복하고, 때론 슬프고, 때론 애틋했던 그대들이 늘 행복하길 바란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랑한다. 우리 꼭 다시 만나자꾸나. 

 

 끝. 그리고 시작!


2024. 03. 15.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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