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더불어민주당 대선·지선 평가 연속토론회]
- 일시: 2022. 06. 14.
- 장소: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
- 주최: 국회의원 강민정·권인숙·고영인·김성주·민병덕·백혜련·양이원영·윤영덕·이수진(비례)·이탄희·천준호
민주당, 어디로 가야 하나?
- 어떤 정치철학적 제언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 철학)
* 이 글의 많은 부분은 필자가 2022년 1월부터 <더 칼럼니스트(the columnist)>에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코너에 발표했던 일련의 칼럼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1. 민주당은 지금 어디에 있나? - 민주공화주의적 위상학
< 저 옛날 로마 공화정에서 보였던 <귀족>과 <평민>의 대립, 곧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자들’과 ‘지배당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의 대립(마키아벨리)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한쪽에는 ‘과두특권독점세력’이 있고, 다른 쪽에는 우리 보통의 평범한 ‘시민’이 있다. 이는 사회정치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사회적 권력’ 대 ‘시민의 힘’(‘시민적 권력’)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그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는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지닌 기득권세력의 과두정이라는 양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 이 세력의 하층 또는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이들의 정치적 대리인에서 출발했던 민주당은 역사적 과정에서 우리 시민들의 힘이라는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서서히 정체성을 바꾸어 왔다. 원치 않은 방식이었더라도 민주당은 ‘시민의 힘’을 대변할 때 성장하고 강력해졌으며 그 반대일 경우 늘 지리멸렬했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시민적-민주적 연대의 논리에 따라 강고한 사회적 권력을 규제하려 하는 시민의 힘을 위한 민주적 도구로서만 그 참된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민주당의 정당으로서의 성공은 그 시민의 힘의 요구와 문법에 충실할 때에만 담보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좌초했던바, 지금의 위기는 바로 이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
◎ 저 멀리 1919년 4월 11일에 반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한 이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정말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인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처음에는 외세의 지배에 시달렸고, 해방 이후에도 오래도록 민간 및 군부의 독재에 신음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이 나라는 비로소 부족한대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시작했고, 조금씩이나마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에 걸맞은 내실을 갖추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공화국(정)’은 ‘혼합정’, 곧 왕정이나 귀족정이나 민주정 같은 순수한 정체가 아니라 여러 정체가 섞인 정체를 의미했다. 서양에서는 로마에서처럼 귀족정과 민주정이 결합한 형태의 공화국이 발전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귀족들이 민주주의를 억누르며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귀족적’ 공화국이 주류였다. 평범한 시민들이 주권자로서 정치적 중심을 형성하는 ‘민주적’ 공화국은 미국이나 프랑스 혁명 이후의 근대적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과정을 단지 서양에만 고유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중국이나 조선 같은 데서는 왕정과 귀족정이 섞인 ‘군신공치(君臣共治)’ 체제가 정착했는데, 우리는 이런 정체도 넓은 의미의 혼합정, 곧 공화국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민본(民本)’은 있어도 ‘민주’는 없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모였던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조선의 왕이 국권 포기를 선언한 상태에서 바로 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을 새롭게 세우려 했다.
안타깝게도 독립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소수의 엘리트(현대의 귀족)가 지배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비록 슘페터 같은 학자는 민주주의조차 결국은 경쟁적 선거를 통해 엘리트 지배자를 번갈아 가며 선출하는 정치 제도일 뿐이라고 냉소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경우 그런 선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1987년의 민주화는, 비록 많은 한계를 갖고 출발하긴 했어도, 시민들이 주권자로 인정되고 투표나 시위 같은 절차를 통해 권력의 행사를 얼마간이나마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 특히 경제, 행정, 사법, 언론, 종교 등의 영역에서 확고한 ‘사회적 권력’을 가진 이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정치적 통제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민주적 정당성을 내세우며, 정치권력마저 움켜쥐고 자신들의 지배적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언론이나 종교 등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을 활용하고 지역주의를 조장했으며,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정치적으로 오도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남성과 여성, 기성 세대와 청년 등을 갈라치기함으로써 지지를 얻으려는 포퓰리즘 전략마저 동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 사회 ‘보수’ 진영이 지닌 정치적 힘의 배경이다.
그런데 이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능력주의(meritocracy)’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일반적으로 사회경제적 수준에서 ‘능력과 노력에 따른 분배’만이 정당하다고 믿는 분배정의에 관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산출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것을 공정하다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비록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이런 식으로 능력주의를 통해 정당화하는 게 꼭 우리나라에서만 고유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그런 경향은 다른 어떤 사회들보다도 강하다고 해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오랜 유교 전통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2천 년 전부터 혈통이 아니라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의 일을 관장해야 한다는 능력주의적인 ‘선현여능(選賢與能)’의 이념이 지배적인 정치철학의 핵심 원리로 자리를 잡았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사람을 시험을 통해 선발하여 관료가 되도록 하는 과거 제도의 발전은 그런 철학 위에서 이루어졌다. 적어도 성리학의 기반 위에 세워졌던 조선 시대 이후 이 땅에도 그와 같은 능력주의 이념은 아주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후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일본의 유자(儒子)화된 사무라이들이 근대적 과거 제도로 만들어 우리에게 전해 준 ‘고시’ 제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이 땅에 뿌리 내린 그 능력주의 문화에 크게 힘입었다. 우리 국민들은 누구든 능력을 계발하는 데서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갖춤으로써 기적적인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도 지배 엘리트들의 이런저런 ‘반칙’ 과 ‘특권’에 대해 원천적인 능력주의적 거부감을 가진 시민들의 열정이 민주주의를 일궈 내고 발전시키는 데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또한 만만찮다. 숱한 교육병리나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도 크지만, 이 과정에서 다양한 차원에서 고학력이나 각종 고시 합격 같은 능력주의적 배경 위에서 성공한 지배 엘리트들이 성장하고, 급기야 정치도 오직 능력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사회적 인식도 함께 퍼지게 되었다는 점도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능력주의를 특별히 ‘정치적 능력주의’라 부를 수 있을 텐데, 그 배경에는 애초 이 땅에 뿌리 내렸던 능력주의가 정치적 차원에서 비롯했다는 사정도 있다.
능력주의는 혈통에 따른 사회적 지위의 세습을 비판하고 거부함으로써 서구에서든 우리 사회에서든 일정한 방식으로 모든 시민의 사회적 지위의 평등이라는 이념에 기초하는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의 지배적 분배 원리가 되면서 ‘승자독식’을 원리로 하는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고 사회적으로 고착화해 나감에 따라, 그것은 점점 더 민주주의 원리와 상충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구나 능력 있는 사람만이 정치를 잘 할 수 있다는 정치적 능력주의의 발전은 민주주의가 전제하는 평범한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와 판단을 불신하고 배제하는 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일단의 학자들은 민주적 선거와는 다른 선발 과정을 거친 소수 엘리트가 실력과 전문성을 내세우며 지배하는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정치 체제를 미화하며 정치적 능력주의라 규정하는데, 이는 이 정치적 능력주의가 보통 시민들의 주권성이라는 이념에 기초하는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를 갖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체제는 새로운 종류의 과두정, ‘능력주의적 과두정’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도 이런 과두정화의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고, 특히 오랜 유교적 전통에 침윤되어 있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아주 강하게 능력주의적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과두정의 성격을 심화시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바로 그 과정의 어떤 정점에서 탄생했다.
돌이켜 보면 적어도 민주화 이후에는 한국 보수 지배 엘리트들도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외피에 큰 신경을 썼다. 그래서 가령 장관 등의 임명 과정에서 얼마간이나마 출신 지역이나 성별 균형도 고려했다. 외국 출신의 이주민이나 시각 장애인을 국회의원 비례 대표 후보로 공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핵 이후 5년 만에 다시 집권한 이 세력은 그런 외피마저 부담스러워하며 아주 노골적으로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자신들의 지배를 당당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안타깝게도 개개인이 지닌 능력과 노력에 따라 부나 사회적 지위를 분배해야 마땅하다는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 일반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정의(공정) 관념이라는 사정도 있다.
이런 배경 위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사실상의 과두정, 그것도 특별한 성격을 지닌 능력주의적 과두정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 민주주의가 늘 모종의, 말하자면 한국적 포퓰리즘이 창궐할 수 있는 토양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와 대통령중심제는 양당체제가 고착화되도록 강제했는데, 그 체제는 그 양당의 틀 안에 포섭되지 않는 수많은 시민들의 정치적 지향과 의지를 방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통령 선거 때마다 엘리트 지배에 대한 비판을 담은 포퓰리즘적 수사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은 제 3 후보가 등장하는 일이 늘 반복되었다. 물론 그런 시도는 지금껏 모두 실패했지만 말이다.
정치 신인 윤석열의 등장도 이런 배경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는 영리하게도 처음부터 거대 보수 정당 안에 들어가서 그 정치적 기반을 활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이준석 대표와 합작하여 그 당을 포퓰리즘 쪽으로 견인하는 신공을 보였다. 그러나 그 포퓰리즘에는 진짜 인민(대중)은 없고, 엉뚱한 상대를 향한 혐오와 적대의 수사만 가득했다. 그는 결국 한국의 ‘결손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정치적 사생아일 뿐이다.
◎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 민주당의 이념적 정체성을 통상적인 방식으로 ‘보수-자유-진보’의 정립 체제라는 인식틀 안에 위치지워서는 안 된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당의 정치적 위상을 그와 같은 틀 속에서 기껏해야 ‘중도 우파’ 정도라고 보는 통상적인 시각은 근본적으로 서구적인 분배정의 패러다임의 산물로서 우리 근대성과 정치 지형이 가진 고유한 맥락을 놓치고 있다. 민주당을 지지해 왔던 시민들의 이념적 기대를 재구성해서 보자면,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당은 독재 세력과 수구 기득권 세력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치를 들고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민주주의적 정의’를 추구하고 실현하려 했던 정치 세력의 중심이었다고 해야 한다.
민주당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무슨 ‘부르주아 정당’도 ‘한갓된 자유주의 정당’도 아니며, 그와 같은 토대적-민주주의적 정의를 갈구하는 우리 사회 모든 시민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충분히 진보적일 수 있는 그런 정당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서 민주당의 권력 기반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권력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른 권력, 곧 ‘시민의 힘(시민적 권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명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야기했을 때의 바로 그 힘 말이다. 이 시민의 힘은 본질적으로 이익의 논리에 기초한 사회적 권력과는 그 근본 성격 자체가 다르다. 그것은 인권과 다른 민주적 가치들에 기초한 ‘민주적 연대성’에 대한 추구에서 생겨나는 ‘힘없는 자들의 힘(the power of the powerless)’이다. 이것은, 가령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지켜내었던 바로 그 힘으로, 사회적 권력과는 다른 문법을 통해 발현된다.
물론 민주당은 현실에서 보수적이고 심지어는 반동적인 뿌리를 가졌다. 그리고 언제나 시민의 힘을 위한 정치적 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 것도 아니다. 그런 민주당이 오늘날에 이르러 얼마간이나마 민주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정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적 연대성의 사회정치적 실현을 갈구하는 시민들이, 사실 미덥지 못해도 딱히 다른 대안이 없어, 민주당을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시켜 줄 정치적 도구로 삼고 싶어 했던 덕분이었다고 해야 한다.
민주당은 말하자면 시민의 힘의 대리자로서만 성공적인 정당정치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시민적-민주적 연대의 논리에 따라 강고한 사회적 권력을 규제하려 하는 시민의 힘을 위한 민주적 도구로서만 그 참된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민주당의 정당으로서의 성공은 그 시민의 힘의 요구와 문법에 충실할 때만 담보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특히 촛불혁명 이후 민주당은 좀 더 적극적으로 그러한 시민적 권력의 요구와 논리에 충실히 복무하는 정치적 대리 기관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었다. 민주당은 민주적 시민사회의 의식적인 정치적 기관이 되어야 했고, 시민정치에 기반을 둔 시민적 진보 정당으로서 스스로를 승화시킬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당은 그러질 못했다.
그 대가는 엄중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동안 민주당은 그와 같은 시민의 힘이 부여한 정치적 위임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할 때마다 위기를 반복해서 겪어 왔던바, 지금의 위기 또한 그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당은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 크게 빚진 ‘촛불’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강한 시민정치의 전통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어떤 정치적 전략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본원적’ 수준의 문제인데, 무엇보다도 민주당조차 ‘정치적 능력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탓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민주주의의 과두정화 경향과 정치적 능력주의는 진보 진영에도 관철되었다. 여기서도 정치는 주로 명문대를 나온 운동권 출신 엘리트, 변호사, 교수 같은 이들이 주도한다.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시민사회와 공론장에서도 능력주의적 배경 위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엘리트 지식인들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진보 정치도 고학력-고수입 엘리트의 이해관계와 관심사에 초점을 두게 되면서, 광범위한 대중의 일상적 삶의 문제들은 좀처럼 정치화되지 못했다. 비록 이 대중들은 선거를 위해 일정한 방식으로 호명되고 동원되기는 하지만, 이들이 평등한 관계 위에서 적극적으로 민주 정치의 과정에 참여할 가능성은 체계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2. 민주당의 정치는 왜 늘 표류하는가? (1) - 진보적 신자유주의
< 검찰 개혁은 확실히 한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민주적-공화주의적 개혁 과제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던 한국 검찰은 자의적 권력 행사를 통한 지배, 그중에서도 특히 시민들의 자유를 보호해야 할 국가 권력이 시민들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 곧 공적 지배(imperium)라는 반민주적, 반공화적 야만의 상징이었다. 그런 만큼 검찰 개혁은 가장 시급한 시대적 과제의 하나다.
이른바 ‘조국 사태’는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검난’의 결과다. 이 난은 과두특권세력 전체의 촛불에 대한 총공세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정’과 ‘내로남불’ 타파를 기치로 펼쳐진 그 공세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적 문화의 배경 속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적 권력은 이토록 막강하다. 그 와중에 민주당과 지지 세력은 입법 과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윤석렬 개인과의 싸움에 몰두하면서도 적절한 시점에 말끔하게 승리를 쟁취하지 못함으로써 수세에 몰렸고, 결과적으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고 말았다. 이후 추진한 ‘검수완박’ 입법도 검찰개혁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고, 오히려 지금 정치적 부담으로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2016년 겨울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단순히 정치권력의 교체만을 원했던 건 아니다. 이전 정권들에서 경험했던 사회경제적 차원의 삶의 피폐함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동기였고, 따라서 더 나은 삶, 물질적으로 더 안정된 삶에 대한 기대는 민주당 정부가 실현해 주길 바란 가장 중요한 염원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당은, ‘최저임금 인상’이나 ‘문재인 케어’ 같이 몇 가지 의미 있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 폭등이나 코로나 민생 위기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너무 소극적으로만 대처하거나 잘못 대응해왔다. 정책적으로 ‘무능’한 탓도 크지만, 촛불의 염원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선거 승리만 노리면서 다양한 성향을 지닌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개혁의 초점을 흐리고 과감한 선제 대응을 보류해 온 탓이 크다. 그 선거지상주의는 몇 번의 선거에서는 일정하게 성공한 듯이 보여도, 작년의 재보궐선거는 물론 가장 중요한 지난 대선에서는 뼈아픈 패배만 안겨주었다. 시민들의 물질적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권’을 실현하는 데 대한 놀라운 무관심은 정치적 지지 기반 자체를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다른 개혁 과제의 실현을 위한 동력도 꺼트리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말기 한미 FTA 체결에 대한 진보 진영의 비판에 답하면서 당시 민주당 정부의 정체성을 ‘진보적 신자유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이 자조적 규정은 바로 민주당을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는 어떤 야누스적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의 모순은 충분히 자각되지 못했다. >
◎ 한국에서도 보수 진영의 핵심에는 물론 ‘재벌’을 필두로 한 경제 권력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은 주류 언론과 종교 권력 등과 같이 자신을 뒷받침하는 보조적 권력 집단 없이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집단은 때로 ‘신성가족’이라고 불리는 사법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인맥과 학맥을 동원한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재벌이나 주류 언론 같은 다른 권력 중심들과 함께 사회의 지배적 중추를 형성하고서 우리 민주주의를 ‘법조지배체제(juristocracy)’로 만들어 놓았다.
이 법조지배체제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여야 할 것 없이 많은 국회의원들이 ‘오변남’(오십대 변호사 남자) 출신이다. 꼭 국회가 아니라도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이른바 법조인들은 막강한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포진한 사법 엘리트들이 최소한의 합리성도 없는 판결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민주주의를 왜곡시켜 왔는지를 숱하게 경험해 왔다. (이런 ‘사법통치’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주 확인되고, juristocracy의 본래의 뜻에 가장 부합한다.) 또 우리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같은 곳이 어떻게 우리 사회 최상층 지배층을 위해 법률적 전문성을 사용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이 법조지배체제의 중심엔 지금껏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해 온 검찰 권력이 있다. 그동안 검찰은 아무런 견제 없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했던 덕분에 시민들에 대한 국가 권력의 자의적 지배를 일삼을 수 있었다. 그러한 권한은 검찰이 시민들을 자신들의 편의대로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게 하며, 자신들과 친밀한 권력자의 범죄에는 눈을 감을 수 있게 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의 검찰은 그런 권한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우호적인 정치권력과 결탁하거나 민주적인 선출 권력을 통제하는 ‘검찰정치’를 해 왔다. 대통령 윤석열은 그런 검찰정치의 정점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이제 이 나라는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이른바 ‘검찰공화국’이 되었다.
지금 많은 시민들이 염원하고 민주당이 추진했던 이른바 ‘검수완박’, 정확하게는 기소-수사권 분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충분히 민주공화국답지 못했다. 민주공화국은 하나의 이상일 뿐 아직 충분히 현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시민들은 지금껏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려 왔다. 지난 ‘촛불혁명’도 바로 그 이상을 실현하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 했던 시민적 염원의 표현이었다. 시민들에 대한 국가 권력의 자의적 지배를 막기 위한 검찰개혁은 그 나라다운 나라, 곧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위한 필수적 전제가 아닐 수 없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는 지구상 거의 대부분의 민주공화국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민주공화국다움의 가장 중요한 가늠자 중의 하나다.
◎ 무슨 형용모순 같은 조합이지만,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정부 이래 민주당이 위태롭게 추구하고 실천해 왔던 정치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민주당이 정치적 진보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지층의 계급적 위치나 이념적 성향을 보아도 그렇고, 추구해 왔던 더 많은 민주주의나 보편 복지의 확대 같은 정치적 지향을 따져도 그렇다. 하지만 민주당은 또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끊임없이 더 많은 ‘성장’을 추구해 왔으며, 합리성과 효율성의 이름 아래 재벌과 대기업을 옹호하고 시장 논리에 순응해 왔다. 단순히 경제 정책에서만이 아니고, 가령 학교에서는 신자유주의적으로 물든 ‘경쟁 교육’ 체제를 적극적으로 완성하기도 했다(이는 지금 이대남 현상의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두 모순적 지향의 정치적 접합이 언제나 매끄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늘 민주당의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다. 선거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포괄정당을 지향해야 하기는 했지만, 민주당은 지나치게 자주 ‘좌회전 깜빡이를 켠 채 우회전을 하는’ 일을 반복했다. 말과 구호는 더할 나위 없이 진보적이지만, 실제 정책은 보수적 선택지에 머물고 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면서도 종부세는 터무니없이 완화하고 재개발을 부추기는 등 오히려 시장을 자극하는 식이다.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외쳤던 이재명 후보의 많은 ‘실용주의’나 ‘소확행’ 공약들도 이 맥락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재미있게도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이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트럼프의 포퓰리즘을 낳았던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본성을 규정한 적이 있다. 그는 경제적 차원의 ‘(재)분배’와 문화적 차이의 존중과 관련된 ‘인정’이라는 두 개념 축을 통해 현대 민주정치를 조망하는 정치철학자인데, 쉽게 말해 미국 민주당은 인정의 정치라는 맥락에서는 성소수자나 유색 인종을 포괄하는 등 매우 진보적이지만 분배정치의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적인 상층 계급 지향을 드러내 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의 이런 모순적 정체성은 많은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트럼프식 포퓰리즘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승리하게 된 결정적 배경을 제공했다.
나는 프레이저식의 분석틀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인정과 재분배의 이원론 그 자체도 따져 볼 지점이 많지만, 가령 인종 문제 같은 건 우리나라에서는 핵심적인 정치적 의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 민주당이 진보와 신자유주의라는 모순적 지향의 어설픈 접합에 기댄 정치를 하면서 지지층의 균열을 낳았고, 그 결과 일부 지지층에게는 정치적 르상티망(원한 감정)마저 불러일으켜 트럼프식 극우 포퓰리즘을 불러들였다는 분석은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좋은 교훈을 준다.
미국의 민주당은 전통적 강세 지역이었던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백인 육체노동자들을 버리는 바람에 트럼프에게 패했지만, 한국의 민주당은 검찰개혁 같은 개혁 과제에 대한 나름 진정성 있는 추진에도 불구하고 특히 이대남으로 상징되는 청년들과 코로나로 심각한 위기에 빠진 자영업자들을 버려서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사실 이들의 삶의 위기와 불안은 진보를 자처해 온 민주당의 좋은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건만, 민주당은 그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우파들이 그 틈새를 파고들었고, 이준석과 윤석열은 꼭 트럼프 방식으로 젠더와 세대, 나아가 국민과 비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포퓰리즘적 선동으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기본적으로 민주당 식 진보적 신자유주의 정치의 혼란이 만들어냈다고 해야 한다.
지금 민주당은 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왜 대중들이 지지를 철회하는 정도를 넘어 아주 적극적으로 민주당을 응징하겠다고 나서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진보적 지향에 대한 거대한 반동의 물결에 휩싸일 조짐을 보인다.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인 색깔을 가진 터라 쉽게 ‘내로남불’에 대한 비판을 자초했던 어설픈 민주당식 진보 지향 탓이 크다고 해야 한다. 민주당 주류는 그마저도 선거 때가 되거나 조금이라도 여론만 나빠지면 마치 진보 지향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엉뚱한 우경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 왔다. 그 결과는 게도 우럭도 다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반대 진영의 지지는 얻어내지도 못하면서 본래의 지치층도 흩어버렸다는 말이다.
3. 민주당의 정치는 왜 늘 표류하는가? (2) - 80년대식 진보의 잔재
<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주류라고 세간의 지목을 받는 이른바 (5)86 세대는 많은 언론과 일부 (전향 (5)86 세대 우익을 포함한) 지식인들에 의해 우리 사회를 망친 주된 적으로 설정되고 있다. 물론 기초적인 비판적 사고만 있어도 이런 식의 선동이 사태를 어떻게 호도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같은 세대의 단지 일부라는 점이나 같은 세대 안에서도 다양한 처지와 상태에 놓인 숱한 개인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상식적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런 식의 접근이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를 세대 문제로 치환하는 전형적인 (우파) 포퓰리즘적 정치 담론이라는 의구심을 가질만하다.
그러나 사실 이 (5)86세대는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역사적 한계를 갖고 있으며, 20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반발은 이 586세대 주류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행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한 마디로 (5)86세대의 진보 또는 80년대산 진보는 말하자면 불투명한 진보다. 민주주의를 소리 높여 외쳤지만, ‘박정희의 자식들’이기도 한 이 세대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하고 실천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추상적으로만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민주주의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쟁취하지도 못했고, 추구했던 민주주의의 이상에는 온갖 종류의 어설픈 급진주의와 특히 강한 민족주의가 섞여 있었다. 무슨 완전한 역사적 퇴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세대의 근본적 자기 성찰 없이 민주당의 미래가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비록 과거의 어설픈 이념은 어쩔 수 없이 버렸다고 해도, 지금은 민주당의 주류가 된 이 세대의 정치적 세계인식의 근본 양식과 틀은 일종의 정치적 사유 습성으로 아직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민주당의 주류 (5)86 정치인들은, 민주화 과정에서는 강력한 무기 또는 동력원이었지만 국가의 통치라는 과제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섬세하고 효율적인 정책의 계발과 실천을 위한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기능적 관료들에게 거의 모든 통치 과제를 맡겨버리고 말았다. 나아가 그런 식의 진보 정치는 한 편으로는 사소한 개인의 도덕적 흠결도 커다란 정치적 자산 손실로 이어지게 하는 ‘도덕정치의 덫’을 자가당착적으로 설정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세력에 대한 과도한 적대 전선을 설정함으로써 우리 민주주의의 고질병인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우리 민주주의의 구조적 한계나 진영 내부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방해했다. >
◎ 사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5)86세대를 두고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소수의 (5)86세대 엘리트들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자신들의 업적을 과장하고 이를 자산 삼아 과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 청년 세대의 빈곤과 절망 같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는 투의 담론이 꽤 넓게 퍼져 있다. 이런 담론은 정치로도 확장되어서 지난 대선 기간에는 ‘(5)86세대 용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유의 담론은 다분히 일부 정치권과 언론이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조장한 측면이 크다고 본다. 일단 사회과학적으로 정확해 보이지 않는데, 단순하게 보더라도 세대 내부의 계급적, 계층적 차이 같은 문제는 저 담론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소수의 엘리트를 적으로 몰아 소외된 다수를 결집하려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담론의 일종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문제를 무턱대고 ‘사람’에 두는 (5)86세대 용퇴론 같은 주장은 그런 담론에 의해 오도된 결과라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그 일원인데) 이 80년대 세대가 별다른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차원에 있고, 어쩌면 이게 더 심각하다.
이 세대는 뜨거운 ‘이념(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았다. 당시 우리 세대는 전두환의 폭압 정치에 맞서는 대안을 모색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물론 심지어 주체사상마저 자생적으로 학습하면서 정치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무엇보다도 80년 5월 광주의 역사적 비극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따라 거친 반미 사상을 내면화했고,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표출되는 민족주의적 지향을 진보라고 이해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서구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연결된 ‘부르주아 민주주의’일 뿐이라는 인식도 일반화되어 있었다.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민주화는 이 세대가 주도하는 변혁 운동에 의존했지만, 이 ‘민주화 세대’는 정작 민주주의의 실질적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했고 또 무지했다. 가령 우리는 민주적 선거란 그저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일 뿐이라고 믿었지 어떤 다른 대안적 제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해도 관심도 없었다. 그냥 모든 걸 당시의 주류 정치인들의 판단과 결정에 맡겨버렸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의 ‘결손 민주주의’ 체제다.
문제는 80년대 말 이후 소련 및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이 세대가 깊숙하게 내면화했던 이념들이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금 단순화하자면, 그 결과 이 세대 대부분은 지독한 이념적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고 해야 한다. 나름의 성찰과 모색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그런 아노미 상태에서 민주주의와 민주 정치에 대해 제대로 학습할 기회도 없이 정치권에도 진출하고 사회 각 부분의 중추적 역할도 맡았다. 비록 대부분은 시대 변화의 압도적 흐름 앞에서 과거의 낡은 이념은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과거의 정치적 세계관의 근본 틀과 사유 습성만은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 세대의 정치적 성공이 함정이었다.
정치권에 진출한 많은 이들은 과거 민주화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자산으로 삼았지만, 사회와 국가를 경영할 실력과 전문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힘든 상태로 중추적 정치인이 되어 갔다. 그러나 그런 도덕적 우월감은 국가의 통치 과제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성장 과정에서 섬세하고 효율적인 정책의 계발과 실천을 위한 역량을 기를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이후에라도 이를 보완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과거의 경력이 여전히 충분한 정치적 자산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집권해서 중책을 맡더라도 실제로는 기능적 관료들에게 거의 모든 통치 과제의 실행을 맡겨버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민주당 정부가 처음에는 여러 부문에서 개혁의 깃발을 소리 높여 외치다가도 곧 꼬리를 내리고 과거의 익숙한 관행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모습을 보인 건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지 싶다.
나아가 그런 식으로 정치도덕적 자산에만 기댔던 진보 정치는 다른 한 편으로는 도덕적 명분과 원칙에 집착하는 ‘도덕정치’의 양식에 크게 의존했다. 그것은 보수 기득권 세력을 압도할 수 있는 좋은 정치적 무기였다. 그러나 이런 정치 양식은 거꾸로 자기 진영에 속한 개인의 사소한 도덕적 흠결도 커다란 정치적 자산 손실을 불러오게 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이 진영이 깊숙이 빠져 허덕였던 ‘내로남불’이라는 덫은 사실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 해야 한다.
한 편 그런 정치 양식은 기득권 세력에 대해 도덕적으로 채색된 과도한 적대 전선을 설정함으로써 우리 민주주의의 고질병인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국가 경영과 관련된 정책의 색깔이나 실천 역량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에 매달리거나 정치적 상대를 ‘토착왜구’ 따위로 규정하면서 악마화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는 민주당의 정치적 확장력을 잠식할 뿐이었다. 심지어 그런 정치 양식은 진영 내부에서도 이견을 가진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 도덕주의적 분노와 적대감을 드러내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상처 입은 많은 이들이 민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했다.
4. 민주당의 정치는 왜 늘 표류하는가? (3) - 좌파 포퓰리즘
< 촛불은 사실상의 ‘과두정’이었던 과거 우리의 ‘고장 난 민주주의’를 개혁하여 좀 더 온전하게 작동하는 민주주의,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내라는 평범한 시민들의 염원에서 출발했다. 더 많은 시민의 참여, 직접 민주주의의 강화 등에 대한 요구는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적극적인 촛불 시민들은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나 민주당 권리당원이 되어 민주당의 주요한 의사결정을 주도했다. 그들은 민주당이 소수 특권 엘리트 세력에 맞서는 시민의 힘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기를 바랐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이 흐름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도 나타났던 ‘좌파 포퓰리즘’(샹탈 무페) 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른바 ‘문빠’나 지금 민주당 내부에서 ‘수박파’를 몰아내자고 공격하고 있는 ‘개혁파’들은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 운동의 강경분파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싶다.
그러나 ‘깨어있는 시민’이 ‘유일하게 올바른 시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민주적 전제를 망각할 때, 소수 기득권세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다는 시민들의 도덕화된 자의식은 쉽게 강퍅한 ‘정체성의 정치’/‘뺄셈의 정치’라는 덫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기도 하지만, 그 민주주의에는 자고 있다고 손가락질 받지만 그 존엄성이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많은 다른 시민들도 함께 살고 있는 법이다. 그들을 설득하고 비판하는 일과 배제하고 쫓아내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다원성, 개방성, 관용, 토론, 오류가능성 같은 가치에 둔감한 민주 정치는 형용모순이다.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 기제와 강고한 과두 특권 연합 세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우리’와 ‘적’의 섣부른 갈라치기가 아니라, 더 나은 시민적 참여를 위한 민주적 제도들을 모색하고 더 성숙한 민주주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동안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의지를 제대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정제되지 못한 좌파 포퓰리즘의 진동이 만들어 낸 수렁에서 제대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민주당은 포퓰리즘이 아니라 ‘씨비시즘(civicism)’, 곧 ‘시민주의’의 길을 갔어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
◎ 민주당 안에서도 포퓰리즘적 계기가 일정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2016/17 년의 ‘촛불혁명’ 이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강성 지지자 중 일부나 최근 이른바 ‘수박파’에 맞서 민주당이 필요한 사회 개혁을 완수할 수 있도록 견인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개혁파’ 시민들의 활동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은 아주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의지와 지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때때로 이견을 억누르고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협애함 때문에 민주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 기반을 오히려 잠식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거 민주주의의 기본 속성만 생각해 보아도 단순한 선명성 강조는 자해 행위일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처럼 단순다수결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곳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근원적인 민주성이다. ‘문자폭탄’ 등으로 상징되는 강경함과 이견에 대한 배제는 그 자체로 민주정치의 본성에 맞지 않다. 다원성, 개방성, 관용, 토론, 오류가능성 같은 가치에 둔감한 민주 정치는 형용모순이다. 물론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 기제와 강고한 과두 특권 연합 세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시민들의 ‘견제’와 ‘쟁론’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건강함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시민적 견제는 ‘우리’와 ‘적’의 섣부른 갈라치기가 아니라 더 나은 시민적 참여를 위한 민주적 제도들을 모색하고 더 성숙한 민주주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상황은 과두정화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빚어내는 단면들이라 이해할 수 있다. 제대로 성공한 포퓰리즘은 없어도 그 계기는 만연하며, 시민들의 민주적 통치에 대한 열망은 엉뚱하게 농락당하거나 갈 곳을 몰라 표류하고 있다. 엘리트에 맞선 시민적 주권성을 놓치지 않되 그런 지향을 무턱대고 엘리트에 대한 적대나 배제로 표현하지 않는 시민참여가 필요하다. ‘시민적 불화’의 방식에 익숙하고 다양성을 긍정하고 이질성을 포용하는 ‘시민적 우애’로 가득한 민주적-공화주의적 시민정치가 절실하다.
본디 민주공화국이라는 건 어떤 사회에서든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적극적 역할을 기대하고 장려할 수밖에 없는 엘리트 집단과 평범한 시민 대중의 가능한 불화와 갈등에 대한 생산적 응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공동선’에 대한 추구와 적극적인 시민참여가 민주공화국에 대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민주적-공화주의적 실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과두정에 맞선 시민정치적 실천은 바로 그런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선취하여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려는 ‘민주적 실험주의’의 틀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민주공화국은 지켜내어야 할 역사적 성취이면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완성해 가야 할 지향점이기도 하다.
포퓰리즘이 아니라 ‘씨비시즘(civicism)’, 곧 ‘시민주의’의 길이 필요하다. 이 길은 언제나 보통의 시민들의 요구와 열망에 충실하되, 얄팍한 정치적 배제와 적대를 부추김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노리려는 길이 아니다. 누구든 공감할 수 있고 그래서 보편화가능한 시민들의 열망과 지향에 기초하고, 시민들 모두의 평등한 상호성을 전제한 위에서 출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상호존중과 평화의 길이며, 시민적 우애와 연대의 길이기 때문이다.
5. 먼저 민주당이 누구인지 답해야 한다.
< 지금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정당으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이념, 정치를 이끌 ‘도덕적 나침반’의 부재 또는 불투명성이다. 흔히 민주당을 자유주의 정당이라고들 하지만 그동안의 민주당 정치는 충분히 자유주의적이지도 못했고(차별금지법에 대한 주저나 ‘역사왜곡처벌죄’ 입법화를 생각해 보라), 좌파라고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재분배나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구해 온 적도 없다. 그러한 이념-맹(盲)/가치-맹은 오늘날과 같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유연성과 실용성을 수용하기 위한 좋은 바탕 같지만, 사실은 민주당의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근본에서 뒤흔드는 독이다. 민주당은 무엇보다도 설득력 있고 체계적이며 실천가능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서 실패했다. 인물 중심의 계파가 사라지지 않고, 대선 때만 되면 당이 한 몸이 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념 정치의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당 내부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무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 다양함에 열려 있되 그래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근본적인 지향만큼은 분명히 하면서 그에 따른 일관된 정책적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민주당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라고 한다. 문제는 민주당의 이런 정치적 불투명성과 무능인데, 어떤 이들은 가령 청년들이 역사를 모른다며 조롱하고 모욕한다. 청년들이 민주당을 영원한 적으로 삼게 할 참인가? 역사를 모르는 청년 세대도 신뢰할 수 있는 미래 전망을 내놔야 한다. 나라다운 나라, 곧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또 실천하면서 같이 가자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에게 정말 그런 역량이 있을까?
민주당은 한국 민주진보 정치의 가장 근본인 시민들의 ‘시민성’이라는 자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우리 시민들은 그저 손익 계산이나 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일구어오지 않았다. 우리 시민들은 정치적 판단을 하면서 단순히 물질적 이해관계에만 매달리는 냉정한 손익계산자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기꺼이 자신들의 이익을 뒤로 밀어 둘 용의가 있는 존재들이다. 시민들은 지금 우리 시민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더 나은 대한민국에 대한 정치적 비전과 희망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
◎ 민주당은 그동안 너무 자주 불투명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바람에 민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신뢰 자산을 제대로 쌓지 못했다. 나는 이 당이 스스로가 과연 어떤 정당이고 어떤 정당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 자기인식 같은 걸 가졌는지 의심한다. 많은 시민이 이 당이 가령 ‘차별금지법’을 마땅히 제정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실효성 있게 만들어 주리라 기대하지만, 이 당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그런 염원에 놀랍도록 관심이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 당에 핵심 이념이나 철학이 없는 탓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념의 시대는 벌써 끝났다. 전통적인 이념들은 급격한 시대 변화에 뒤처져 버렸고,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어 집권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의 이념적 중도화와 포괄적 지향은 필수적이다. 기후 위기 같은 문제는 전통적인 좌우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우리 민주당처럼 기본적인 정치철학과 지향을 아무렇게나 여겨도 좋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당은 지금 개인의 도덕적 완결성 같은 데는 집착하면서도 정당으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이념, 말하자면 정치를 이끌 ‘도덕적 나침반’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게 민주당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흔히 민주당을 자유주의 정당이라고들 하지만 그동안의 민주당 정치는 충분히 자유주의적이지도 못했고(차별금지법에 대한 주저나 ‘역사왜곡처벌죄’ 입법화를 생각해 보라), 좌파라고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재분배나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구해 온 적도 없다(코로나 팬데믹으로 생존 위기에 처한 소상공인들에 대한 그 잔인한 무시를 생각해 보라).
그러한 이념-맹(盲) 또는 가치-맹은 오늘날과 같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유연성과 실용성을 수용하기 위한 좋은 바탕 같지만, 사실은 민주당의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근본에서 뒤흔드는 독이다. 민주당은 무엇보다도 설득력 있고 체계적이며 실천 가능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서 실패했다. 나는 지난 대선 패배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런 유의 비전 제시 없이 ‘소확행’ 전술에만 집착했던 데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배경 위에서 민주당 안에서는 아직 너무도 시대착오적인 계파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도대체 친문/친이/친명이 뭔가? 가치에 대한 헌신의 강도나 우선순위 설정 또는 실천 전략 같은 걸 두고 나뉘는 계파가 아니라, 영향력 있는 정치인에 대한 친소 여부가 계파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민주당의 정치적 퇴행성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념 정치의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당 같이 큰 정당 안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음을 무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 다양함에 열려 있되 그래도 그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근본적인 지향만큼은 분명히 하면서 그에 따른 일관된 정책적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려면 단순히 상대의 실책을 기다릴 게 아니라 그야말로 환골탈태하는 수준의 자기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인적 교체나 세대교체도 꼭 필요하겠지만, 정치적 정체성부터 분명히 하고 이를 공유하고 실천하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일이 너무 추상적이고 복잡한 일일 거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가진 동안 처리해야 할 개혁 입법의 목록을 만들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의제를 놓고 대토론을 벌이는 일부터 시작해 보라. 과연 어떤 정책과 입법이 민주공화국의 이념에 대한 최선의 해석이자 실천일지를 두고 백가쟁명도 하고 정치적 경합도 해 보라. 그런 과정에서 민주당의 정치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가 다소간 분명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민주당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앞으로 그 일들을 얼마나 제대로 해내느냐에 민주당의 미래가 달렸다. 부디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 민주당은 한국 민주진보 정치의 가장 근본인 시민들의 ‘시민성(citizenship)’ 또는 ‘시민다움’이라는 자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우리 시민들은 그저 손익 계산이나 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일구어오지 않았다. 물론 시민들도 인간으로서 이런저런 물질적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위협당할 때는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한다. 집값 폭등이나 자영업의 생존 위기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 도정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해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일정한 정치적 가치와 인식틀을 통해 매개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시민들은 정치적 판단을 하면서 단순히 물질적 이해관계에만 매달리는 냉정한 손익계산자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기꺼이 자신들의 이익을 뒤로 밀어 둘 용의가 있는 존재들이다. 이 점을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5년 전의 ‘촛불혁명’만 떠 올려 보면 된다. 그 추운 겨울에도 우리 시민들은 몇 달이고 소중한 자기 시간과 경비를 들여 광장으로 모여 촛불을 들었다. 시민들은 폭력 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엄청난 자제력을 보였고 스스로 나서 거리와 광장도 깨끗하게 청소하는 등 놀라운 시민적 헌신을 보이며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평화적 저항을 통해 불의한 정권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그 때 시민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품격에 대한 ‘민주적 우환의식’ 때문에 광장으로 나왔다. 바로 이런 게 시민성이고 시민다움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으로 그 촛불혁명의 정신이 빛이 바랬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촛불의 초점을 박근혜 탄핵과 단죄에만 두면 안 된다. 민주당 정부의 진짜 패착은 그 촛불의 성취를 누리면서도 그 참된 지향인 ‘공동선의 정치’ 를 실천하는 데 충실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민주당은 촛불 이후 지금까지 치러진 대부분의 선거에서 이겼지만, 그 승리를 어정쩡한 표계산의 결과로 오해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개혁은 자꾸만 미루고 부동산 문제에 대한 땜질 식 처방이나 서울 및 부산 시장 억지 공천 같은 일을 일삼았을 뿐이다. 그 결과 지금 엄청난 정치적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자신의 진짜 정치적 자산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탓이다. 이런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은 지금 우리 시민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더 나은 대한민국에 대한 정치적 비전과 희망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시민들이 그저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으리라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숱한 근본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부동산이나 코로나 팬데믹뿐만 아니라, 지독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양극화, 사회적 파편화, 이제는 젠더 차원에서마저 첨예화된 사회 갈등, 여전히 꿈쩍도 않는 분단체제, 미래 세대의 인간성을 좀먹고 있는 숱한 교육 병리 등 일일이 언급하는 것조차 버겁다. 전 지구적 차원의 기후 위기 문제 같은 건 어떤가? 우리 시민들은 민주당이 이런 문제들에 어떤 비전과 희망을 - 19 - 갖고 접근하려 하는지를 애타게 보고 싶어 한다. 여기에 응답하라.
그러나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우리 시민들은 그런 문제들을 그저 지도자의 리더십에만 맡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 함께 참여하여 해결하기를 바란다. 훌륭한 지도자는 공동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평범한 시민들의 이런 시민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게끔 배려하고 그것을 불러 내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시민들은 언제나 그런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시민들을 믿고 시민들과 함께 하려는 정치가 절실하다. 시민다움에 호소하라.
◎ 무턱대고 민주당이 진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문제는 진보 개념 자체의 불투명성이다. IMF 체제 속에서 처음으로 집권했던 민주당의 신자유주의 지향은 오늘날의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얼마간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고,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 속에서 무턱대고 전통적인 분배정치를 반복하거나 강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확산 등에 따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지형도 급변하고 있다. 변화된 상황과 조건에 맞는 새로운 ‘시민적 진보’에 대한 모색이 절실하다.
이 새로운 시민적 진보가 어떤 것일지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여유는 없다. 내 생각에 마이클 샌델은 지난번 이재명 후보와의 화상 대담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실마리 하나를 제시했는데, 이 이야기만 좀 더 하자. 그 대담에서 샌델은 이 후보에게 빈부격차 해소나 계층 상승의 사다리에 오르기 위한 공정한 기회 제공만큼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함께 공동선을 논의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내가 볼 때 민주당과 이 후보는 샌델이 제시한 이 실마리를 제대로 살려오지 못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샌델이 강조한 대로 그동안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 더 많이 공공의 삶에서 차지하는 몫을 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대남을 포함한 청년 세대나 자영업자들의 민주당에 대한 불만의 핵심도 단순히 젠더 갈등이나 적은 지원금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과 불안이 제대로 경청되고 존중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은 단순히 ‘나를 위해’ 이익이 되는 소소한 공약들이 아니라 ‘내가 함께’ 만들어 갈 미래를 더 원한다.
6. 이제 정치개혁이다!
< 촛불이 염원했던 ‘나라다운 나라’는 단순히 대통령 개인을 바꾸고 공직의 - 20 - 주인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결손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를 더 냉철히 성찰하고 법과 제도를 보완하고 정비하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데로 나아가야 했다. 문재인 같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 대통령이 되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5년 단임제의 한계는? 승자독식의 원리에 기초한 현행 선거제도는? 지방분권은? 물론 이런 문제들에 대해 유일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동안 인적인 차원의 ‘적폐 청산’이 아니라 바로 이런 구조적 차원의 문제들을 더 많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또 개혁했어야 했다.
앞서 소개한 샌델의 제언은 ‘민주주의적 정의’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지난 대선 국면에서 제기되어 왔던 ‘정치개혁’/‘정치교체’의 과제와도 연결된다. 정치개혁은 단순히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5)86세대 용퇴’ 같은 인적 쇄신과 등치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정치적 질곡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념적, 정치적 지향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분열과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를 일상이 되도록 만들고 있는 승자독식 원리의 단순다수결 선거제도다. 이를 바꿔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지금 20대 국회 상황은 이를 위한 가장 적절한, 어쩌면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87년식 인식틀을 버려야 한다. 민주당과 많은 지지자들은 아직도 반민주 세력에 맞서는 민주화 투쟁이 진보 정치의 본령이라는 착각 속에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반드시 민주당 정부만이 ‘민주정부’일 수는 없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어도 또 국회에서 절대 다수석을 가졌어도 할 수 없는 일도 많았고 또 해야만 했지만 하지 않은 일도 많았다. 민주당의 부족함 탓도 크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정치체제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이제는 단순한 ‘민주화 프레임’을 넘어 더 나은 민주주의 체제를 모색하고 실험해야 할 때다. 여기에 더 나은 진보의 길도 있다. >
◎ 민주화 이후 35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차례 정권교체를 통해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집권하고 통치해 왔다. 이런 게 민주주의의 중요한 양상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시민들이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만으로는 우리 정치의 양상이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 이뤄 낸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정치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늘 무능했으며, 대통령과 여당은 임기 말이면 늘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그리하여 대선 때만 되면 새로운 정권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상황이 계속 반복됐더랬다.
단지 특정 대통령 개인 또는 정당의 잘못된 정치적 성향이나 양식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든 양상은 늘 비슷했으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기본구조다. 이 체제에서는 진보 정권에서든 보수 정권에서든 정치권은 늘 두 진영으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해 왔고, 그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일들이 공동선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진영적 편익에 따라 판단되고 처리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정치는, 시민들 사이의 의견을 교환하고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해법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진영에 따라 서로 다르게 규정된 진리를 고집스럽게 관철하는 이전투구의 장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숱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문제들을 증폭시키거나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뿌리가 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정치에서 아예 배제되어 버렸다. 정치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정치는 서로 지역적 기반과 정치적 색깔만 달리하는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공동선으로 포장되었고, 해결해야 할 숱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민주적인 숙의 대신 일부 정치계급의 독단이 정치 과정을 채웠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평범한 시민들이 주권을 가진 민주정이 아니라 사실은 일부 소수 엘리트가 정치적 과정과 권력을 독점하는 과두정이 되고 말았다. 정권교체를 넘어서는 정치교체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 맥락에서 제기된다.
정말 해결해야 할 근본 문제는 우리 정치의 근본 틀을 규정하는 국회의원 선거제도다. 이걸 바꾸지 않으면 정치교체는 구조적으로 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선거제도는 단순다수결 승자독식의 원리에 기초하는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의 문법은 거의 필연적으로 양당 체제를 유도하고, 두 거대 정당에 수렴되지 않는 많은 정치적 지향들이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가 지역주의마저 첨예화한다.
이 제도에서는 가령 호남의 국힘당 지지자들이나 영남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국회의원을 뽑을 수 없고, 정의당 같은 군소정당 지지자들도 지역구를 통해서든 비례대표를 통해서든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정치 과정에 제대로 반영할 방법을 가질 수 없다. 이들은 이번 대선 같은 박빙의 선거 과정에서는 이른바 ‘사표’ 논란에도 시달린다. 쉽게 말해 이 제도에서는 모든 유권자의 한 표가 똑같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몇 년 전에는 제한적이라도 각 정당에게 지지율에 연동하여 의석을 배분하는 제도를 새로이 마련했지만, 알다시피 두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창당 때문에 외려 양당 체제는 더 강화되고 말았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지선 평가 연속토론회 (2022. 06. 08. / 06. 14. / 06. 17. - 사진 양이원영 의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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